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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2. 28. 14:25

지구가 멈추는 날 포스터

SF 영화를 볼 때면 습관처럼 눈여겨 보는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논리적 일관성이다. 굳이 SF 영화가 아니고 다른 장르의 영화라고 할지라도 작품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이 바로 논리적 일관성일 테지만 유독 SF 영화에서는 논리적 비약 또는 전제와 결론의 불일치가 뻔뻔스레 자행되는 경우가 흔한 것 같다. 과학적 상식이 다른 분야의 상식보다 대중과 조금 더 많이 유리된 점을 십분 활용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게 바로 SF라는 장르가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독자나 관객의 눈높이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 봤던 '지구가 멈추는 날'은 인간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발달한 외계의 초문명이 전제되어 있다. 예컨대 광속의 1/10에 육박하는 엄청난 속력으로 항성간 우주 여행을 쉽게 할 수 있고, 생명을 복제하거나 창조해서 어떤 기억이나 정체성까지 프로그래밍할 수 있고,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로봇(?)을 만들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등 인류의 최고 지성들을 모아 놔도 그들의 수준에 비하면 원숭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뛰어난 문명이 가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외계인들이 인간의 문명이 낳은 폐해와 부작용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해 고작 생각해낸 방법이라는 게 우스꽝스럽게도 인간을 멸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원작을 본 적은 없지만 이 영화가 1940년에 발표된 원작(Farewell to the Master)과 다를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은 첫째, 원작에서는 외계인이었을 클라투(키아누 리브스)가 이 영화에서는 외계인 본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엄밀히 말해 클라투는 어떤 등산객의 손등에서 떼어낸 DNA를 통해 복제한 클론 또는 안드로이드에 가깝고 그의 행동이나 사고는 프로그래밍된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물론 다른 종의 개체를 자유자재로 숙주로 이용하며 영생하는 일종의 기생수와 같은 외계인을 상상할 수도 있지만 오컴의 면도날을 생각한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둘째, 인류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artifact)들을 깨끗이 청소하기 위해 클라투와 동행한 고트(Gort, 신을 뜻하는 독일어 Gott에서 따왔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름이다)가 나노 로봇이라는 설정도 원작과는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원작이 발표된 당시에는 나노 로봇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참고로 이 영화에서 가장 어설프게 느껴졌던 대목이 바로 클라투와 동행한 이 정체 불명의 존재에 대해 한 병사가 고트라는 이름을 가진 나노 로봇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이다. 마치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일순간 전지적 작가 시점의 등장 인물이 나와서 얘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고 대체 누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됐는지 즉각 의문이 떠올라 매우 거북한 기분이 될 수도 있다.

셋째, 이 영화의 주제이자 클라투가 변심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는 생물학적 이타주의도 원작을 각색한 작가나 감독에 의해 현대적 색깔을 덧칠할 수 있는 적절한 포장물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원작에서는 사랑이나 평화 등으로 표현됐을 게 뻔한 말을 그저 이타주의라는 용어로 대체해 현대적 느낌을 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우주미생물학, 영화 중간에 잠깐 등장하는 무인항공기(UAV) 프레데터, 고트의 EMP(전자제품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파장), 죽은 사람까지도 살려내는 연고 타입의 인스턴트 줄기세포 엑기스(!) 등도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과학기술이나 그 산물을 동원한 부분인 만큼 1940년대 수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묘사됐을 원작과는 다를 것이다.

사실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에 낙제점을 주기에 앞서 이 영화에서 엿볼 수 있는 문명에 대한 불신론과 그에 상반된 낙관주의의 어설픈 타협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마치 공장에 불을 지르고 더러운 땅을 청소하고 말살함으로써 다시 잔디가 자라는 토양을 가꾸고 먼지투성이의 시멘트 세계에서 다시 초원과 들판, 개울과 늪지를 만들라는 식의 반문명주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인한 기존의 사상적 기반의 붕괴와 함께 벨 에포크(Belle Epoque)가 막을 내리면서 세계 제1차 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참화를 겪은 후 대두됐던 전 인류적 반성과 성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반문명주의는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안티테제의 수준에 그치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할 만한 굳건한 기반과 동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필연적으로 혼란과 함께 반동의 물결을 불러올 수 밖에 없었다. 사상적으로는 군국주의나 반유태주의 같은 혼란스러운 반동의 파고가 요동쳤고 현실적으로는 대공황이 가까스로 진정됐지만 그 부작용으로 다시 세계 대전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던 시기에 발표된 원작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그런 어설픈 타협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자신의 고발 내용에 대해 마음속에 회의를 품은 고발자의 치열하지 못함에 대한 변명 정도로 치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앞서 말했듯이 원작이 쓰여질 당시에나 이해됐을 법한 어정쩡한 태도를 21세기 고도산업사회를 살고 있는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유지했다는 점이다. 물론 일방적인 불신론이나 낙관주의 모두 그 경도의 정도와 상관없이 신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지성들에게 있어 진리는, 신앙을 버리고 건강한 갈등과 대립의 긴장관계를 유지한 채 불확실성의 세계를 공존, 공생, 공행할 때 얼마나 많은 공포와 불안 또 그로 인한 혼란을 경감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가 되었지만 대중을 대상으로 한 상업영화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해야 함이 당연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물질 문명의 혜택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유태인, 공산주의자를 악의 축으로 몰아갔던 시대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정신 세계에 머무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신앙이 없거나 뭔가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나마 망각할 수 있게 하는 즉물적인 자극이 부족한 것은 해당 분야의 어떤 기술적인 측면을 떠나서 악덕으로 규정지을 수 밖에 없다. 사실 진리 따위의 거창한 얘기는 꺼낼 필요도 없었지만 단순하게 말해 낭비는 악덕이라고 생각하면 쉬운 일이다.

키아누 리브스라는 멋진 배우의 필모그라피에 왠지 오점으로 남을 것만 같은, 감동도 자극도 철학도 빈곤한 이 낭비 덩어리를 과연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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