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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1. 17:12
우리가 자주 쓰는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라는 단어가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는 웹 사이트를 뜻하는 단어인 '블로그(blog)'와 장소, 공간 등을 의미하는 단어인 '스피어(sphere)'를 합쳐 만든 말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이 단어는 1999년 9월 10일 Brad L. Graham이라는 한 블로거가 농담삼아 처음 만들어내고 2002년 SF소설가이자 영향력있는 블로거 중의 한 명으로서 'Daily Pundit'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William Quick이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블로거들에 의해 급속히 채택되고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영어권에서 이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는 때로 블로그스피어(blogsphere)라고 쓰이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블로그스피어(blogsphere)는 일종의 상표로서 IBM사의 서버용 소프트웨어인 Lotus Domino용 블로깅 툴(blogging tool)의 이름이기 때문에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가 훨씬 일반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개인적으로도 처음에는 블로그스피어(blogsphere)라고만 알고 사용하였으나 올블로그(http://www.allblog.net)의 첫화면에 '블로고스피어는 지금'이라고 쓰인 글귀를 보고 의문을 품은 이후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로 통일하여 사용하고 있다.

블로그의 순화된 우리말은 '누리사랑방'이라고 한다. 사실 블로거의 눈에 비친 이 표현은 의미도 와닿지 않는데다 세 글자에서 다섯 글자로 늘어난 만큼 보다 쉽고 간편한 단어로 순화되지 못해서인지 정착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는 조금 순화시켜 '블로그세상'이라고 표현하더라도 더 친근하게 와닿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008. 1. 1. 00:24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버트란드 러셀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만 실존주의 철학자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가 동물 행동학과 진화 생물학을 전공한 영국인 과학자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들을 다루기 힘든 것이 당연하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무신론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선 그에게서 '신은 죽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던지며 일생을 기독교와 싸웠던 니체나 '인간은 無 한가운데 던져진 존재(Geworfenheit)'라고 했던 하이데거, 또는 '존재는 필연이 아닌 우연이다'던 사르트르와 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그림자를 찾아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다만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자로서 다윈주의를 근거로 한 '신은 없다, 창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주장을 가지고 대중을 설득하려고 하는 반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당시에 이미 무신론을 기정사실로 받아 들이고 오히려 그로 인해 인간에게 초래되는 불안과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앞의 글에서 제기했던 '믿음 또는 신앙이 없거나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한 부정을 감내할 만큼의 충분한 지적인 용기가 없으면 불안, 절망, 우울, 고통 등이 야기된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들을 인용해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19세기 도스트예프스키가 '악령'에서 무신론으로 인한 불안과 허무를 벗어날 방법은 자살 밖에 없다는 듯 끼릴로프와 스따브로긴을 자살로 내몰았을 때나 니체가 '신은 죽었다. 고로 우리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신은 모든 존재와 모든 가치의 근원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러한 불안과 허무는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지금은 19세기 만큼 종교가 인생에서 일정한 의미를 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또 당시의 사고방식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기에는 생물학, 의학, 심리학, 인류학, 종교학, 고고학, 사회학 등 여러 분야의 수많은 성과들이 신에 대한 의문을 당연시 여기게 만들었다. 따라서 무신론에 의한 불안이나 허무는 시위를 당긴 만큼 화살이 나가는 것처럼 유신론에 경도되었던 만큼 그 반작용으로 인한 충격과 고통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렇다면 루이스 월퍼트의 주장처럼 믿음 또는 신앙이란 생존 경쟁에 유리하기 위한 진화의 산물로서 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명령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25세기가 되어도 교회와 절은 동네마다 안존할 것'인가? 개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무속행위가 존재하듯이 역사보다도 인간의 내면에 더 뿌리를 깊게 내린 종교도 어떤 형태로든 생존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형태와 규모로 안존할 것이라는 말은 넌센스다. 즉 왕실에서 국가 중대사를 놓고 굿을 벌였던 15세기의 무당과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기꾼과 동급으로 취급받는 21세기의 무당이 큰 차이가 있듯이 무신론적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과거의 단점과 해악을 줄이는 쪽으로 변화하지 않는 종교의 영향력은 급속히 감퇴하여 종교는 일순간에 지식하위계층의 미개한 습속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또한 현재 과학의 발전 속도나 수요를 생각했을 때 월퍼트가 주장하는 종교의 순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발명품이 나오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다만 이런 예상은 종교를 이용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의 반발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고 그 반발의 여부와 정도에 따라서 종교 몰락의 일정은 늦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지역, 문화 등 개별적 특수성도 고려하지 않았다). 또 이는 월퍼트와 같은 다윈주의자들에게는 '인생의 의미가 정해지지 않았듯이 진화의 방향이나 속도 또한 정해지지 않았다.'는 명제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2007. 12. 31. 16:53

가끔 냉정하게 변하는 현실과 어울리지 못하여 점점 퇴색되어가지만 폐기되지는 않을 것이 명백한 고정관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고민이 들 때가 있다.

가령 일부일처제에 대해 대다수 인류가 가지고 있던 근대의 확고한 믿음은 여러 사회생물학적 성과에 의해 도전받고 있고 현대문명에서 비롯된 생활양식의 수많은 변화는 이러한 인식의 천이를 가속화시키고 있는데 가족제도나 짝짓기에 관해 관찰되는 인간의 행태가 야생동물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다양한 연구의 결론들은 사실상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며 또한 종교, 법률, 도덕 등 사회적 제도의 틀 안에 인간의 본능을 가두어 두고 이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고안된 당위들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엥겔스는 일부일처제의 역사적 기원에 대해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남성이 여성의 성을 통제하면서 상속자를 보호하고 재산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일처제가 필요했다는 주장을 했고 베블런(Veblen)은 '유한계급론'에서 "적에게서 전리품으로 여성을 약탈하는 행위가 소유권 혼인 행태를 낳았다"고 주장했으나 이러한 경제학적 관점의 주장들에 일부일처제가 실은 생물학적으로도 인간의 본능에 어긋나는 제도였다라는 설명을 덧붙인다고 해서 현재의 일부일처제를 후퇴시킬 빌미는 전혀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문장 중 일부는 '한겨레21'의 기사 '진화하는 모노가미'중에서 부분 인용)

사실 인류 전체 및 역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일부다처제 또는 일처다부제가 비정상으로 취급되던 시기나 지역은 매우 한정적이었으며 현재도 일부일처제가 인류에게 있어 아주 지배적인 가족제도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는 굳이 이슬람 문화권이나 과거의 동양문화권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쉽게 수긍이 가는 얘기로서 어찌보면 일부일처제란 서구에서 발명된 제도라고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기본적으로 우수한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고자 하는 진화적 본능 때문에 남성은 되도록 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고 여성은 양육을 고려해서 좀 더 강하고 우수하며 헌신적인 남성을 찾게 된다는 사회생물학적 관점은 인간의 일부 이중적 행태, 특히 짝짓기에 관해 야생동물적 본능과 인간적 이성이 충돌하는 경계에서 드러나는 이중성에 대한 명료한 해석의 기준을 제공한다. 즉, 짝짓기에서 보이는 인간행태의 이중성이란 더 나은 상대방을(에게) 선택하기, 또는 선택되기를 바라는 구애의 몸짓을 보다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 벌이는 속임수와 차별화에서 비롯된 것이며 속임수는 각 개인의 내면적 모순과 이중성, 차별화는 집단 내 개인들간의 모순과 이중성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