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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23. 00:38
한국 사회에서 '진보주의자'라는 말처럼 헷갈리는 말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본다. 대체로 진보냐 보수냐는 기존 질서나 권위에 대한 저항 여부를 가지고 판단하지만 막상 어떤 대상의 태도에 대한 판단(저항적이냐 순응적이냐)이 서더라도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 태도를 현상과 실제, 행위와 사유로 나눠 생각하면 더욱 어려워진다. 가령 기존 질서에 대한 반성적 사유가 없거나 부족하지만 개인적, 집단적 이익을 침해당했거나 침해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반발과 저항을 한다거나 사유의 영역에만 침잠한 채 구체적 행동이나 실천은 전혀 뒤따르지 않는 경우 또는 분노, 환희, 동정심과 같은 심리적 요인이 개입하여 태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바로 그렇다. 또 개별 사안이나 카테고리에 따라서 얼마든지 태도가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어려움을 더하게 된다.

얼마 전 민노씨 블로그에 들렀다가 '독선적 계몽주의'라는 표현을 봤다. 지적인 우월감을 바탕으로 대중을 선도하려드는 '진보주의자'들의 구태의연한 시도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이 엿보이는 짧은 글에서였다. 민노씨는 진보를 표방하면서 때로는 교조주의적이거나 파시스트적인 모습을 보이곤 하는 진보주의자들을 이율배반적인 모순덩어리라고 보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이는 각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또 유지시키기 위한 사회적 본능에 따른 일관성에 대한 강박적 타성이 작용한 결과로 생각된다. 비록 우스꽝스럽게 보이거나 기이하게 보일지라도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진보적 태도와 보수적 태도가 다양한 모습으로 혼재한다고 보는 게 한국적 현실에서는 훨씬 더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관성이 유지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비판적 사유와 자기 성찰의 빈곤이다. 누군가 유럽의 6.8운동과 우리의 민주화 운동을 비교하면서 말하길 6.8운동은 기존 질서와 권위에 대한 부정과 반발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민주화 운동은 분배라는 관점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소위 운동권 내부에서조차 거부감 없이 군사문화를 수용해 위계질서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권위주의적 편견이 팽배한 모습들을 흔치않게 볼 수 있었다라고 한 적이 있다. 외국 사상서들의 저급한 번역본이 주입식으로 앵무새처럼 전달되는 것도 문제였지만 일종의 열등의식과 폐쇄적 문화가 진입장벽을 만들어 사상적 토대를 다지는데 방해가 된 측면도 있다. 즉 한국적 현실에서 일관성이 없는 진보주의자들의 모습은 사안별로 태도를 달리 취한다기보다는 사상적 토대의 부실함에 기인한 탓이 크다는 얘기다. 쉽게 말하자면 밖에서는 자칭 진보주의자라는 사람이 집안에서는 가장이란 이름의 폭군이 되고 한편으로는 남녀차별적 행태를 손쉽게 용인하는 등의 기괴한 모습들이 내게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자기정체성을 진보라는 틀로 일관되게 통합해 줄 수 있는 비판적 사유와 자기 성찰이 부족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식과 위선의 거품을 뺀 채 '이러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나는 보수주의자'라고 당당히 말한다면 그 또한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예로 든 일관성 부재의 모습은 일반화하기에는 무리인 소수의 사기꾼, 얼치기 진보주의자들만의 얘기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앞서 말한 한국적 진보의 비극은 위에서 언급한 '엘리트적 계몽주의'와도 끈이 닿는데 대중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해야한다는 총론에는 이르렀을지언정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는 속담처럼 각론에서는 여전히 주입식 행태를 못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생존 경쟁에 몰입한 나머지 합목적적 사고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버린 대중에게 합리적 사고를 전제로 한 정책과 정보전달에 치중하고 있으니 늘 엇박자가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최소한 그들에게 합리적 사고가 가능한 여건과 토대를 제공하든지 생존 경쟁에 합목적적인 정책을 개발하든지 둘 중의 한 가지를 택해야 하지 않을까. 둘 다 병행할 수 있다면 더 낫겠지만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바로 부와 권력을 쥔 자들의 반작용에 대한 고려의 문제다.

종종 나는 부자나 권력자들에게도 (정서적) 배려는 필요하다고 얘길 하곤 하는데 공동체적 전통이 강하고 정에 약한 우리나라 국민성의 특성상 그들에 대한 증오와 불신을 키우고 조장하여 진보적 운동의 원동력으로 삼는 것은 절대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과잉된 감정은 소모적인 대립과 낭비만을 가져올 뿐이다. 어떤 감정을 부추겨도 용인될 만한 특별한 사안이 있을 때나 한시적이고 개별적이라는 단서 하에 권력투쟁을 위해 감정적 에너지가 이용될 수도 있겠지만 원칙적으로는 오히려 상대방이 도발해오더라도 일부러 피해야 한다. 정치적 차원에서는 좋다(good), 나쁘다(evil)의 대결이 아닌 옳다(right), 그르다(wrong)의 대결이 되야 한다는 뜻이다. 변화는 아무리 힘이 쌘 자에게도 불안과 두려움의 씨앗이 될 수 있다. 어떤 상황이 예측불가능한 파국으로 치달을 때는 바로 사람들의 이런 불안과 두려움, 또는 감정의 과잉 탓이 대부분이다.

진보주의자의 수명은 짧다. 끊임없는 회의와 반성이 없는 진보주의자는 시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또한 진보주의자는 진보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야 살 수 있다.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건강한 진보주의를 통해 공동체의 번영을 이뤄나가고 이익을 확장시켜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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