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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에 해당되는 글 2건
2008. 9. 5. 01:23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매력적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타인의 감정에 능숙하게 공감하며 이에 기반한 존중과 배려를 통해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간다. 그들의 감수성이 따스한 노을빛을 띨 때 여유로운 온정과 인간미가 넘쳐 흐르며 다른 이들로 하여금 인간과 삶에 대한 낙관적 기대와 희망을 품게 한다. 또한 발랄한 호기심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충만한 개나릿빛 감수성은 놀라운 즐거움과 함께 언제든 다시 행복하게 곱씹을 수 있는 잔잔한 기억으로 남겨 함께하는 시간을 영속하게 한다.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도 상처입는 걸 두려워한다.

반면 불안과 허무가 지배하는 잿빛 감수성도 있다. 강렬한 자극에 상처입은 영혼은 스스로 외피를 만들어 다시는 동일한 경험을 겪지 않으려 하게 되고 조심스러운 자책과 경계로 둘러싸인 감수성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스스로 치유된다. 하지만 그런 보호막을 만드는데 실패한 핏빛 감수성은 마치 복수라도 하려는 듯 냉소와 절망이 뒤섞인 감정의 독무를 뿜어내어 다른 이들을 상처입히고 자신은 파멸의 길을 걷는다.

감수성은 메마르고 타락한다.

아무런 대가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고 의지할 대상이 없는 감수성은 쉬이 메마른다. 그 대상은 사람이나 동물, 식물이 될 수도 있고, 시나 음악, 미술과 같은 예술이 될 수도 있고, 학문적 열정이나 노동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사람을 그 대상으로 할 때는 믿음이 필요하며 사람 이외의 것들을 대상으로 할 때는 장작에 불을 붙일 때 필요한 불쏘시개 만큼의 훈련이 필요하다. 이렇게 감수성이 메마르면 대신하여 탐닉할 대상을 찾게 되고 민감한 충동적 자극과 순간적인 쾌락에 몰입해서 고이게 된 감수성은 타락하여 칠흑빛이 된다.

자본은 거짓 감수성을 조장한다.

자본이 만들어낸 거짓 감수성은 교감이 없는 섹스와도 비슷하다. 당장 보고 듣고 만지며 자신은 뭔가를 느꼈다고 믿지만 뒤돌아 보면 공허하기 짝이 없어 기억하기도 힘든 숱한 유행들은 바로 이런 거짓 감수성에 기인한다. 자신만의 감수성을 대부분 잃어버리고서 마음속 깊이 이를 동경하게 된 대중은 곧잘 이에 혹하고 온갖 시늉을 통해 갖가지 열풍을 만들어낸다. 모래와 같은 거짓 감수성은 소비에 걸신들린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고 자본과 결탁하거나 그에 기생하는 문화에 의해 뒷받침되며 근본적인 성찰이 부족한 채 감수성을 말살시키는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교육에 의해 유지된다. 대중이 풍요로움의 한가운데 서 있으면서도 늘 갈증과 배고픔을 느끼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꽃과 열매를 기다리지 않고 싹만 틔워 팔아치우는 싸구려 시뮬라크르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탓이며 시뮬라시옹을 통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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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3. 15. 15:42

자본과 인간의 일대일 대응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자본의 파생실재(hyperreal)가 되어가고 있다. '자본은 상징적 규칙에 따라 응수해야 하는 하나의 도전(p.46)'이라는 보드리야르의 언급은 이미 낡고 진부하며, 스스로 판 함정에 갇혀있는 듯하다. 하지만 자본에 대한 고발은 이미 사라져가는 체계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시도일 뿐만 아니라 시뮬라크르화된 사회에서 엿볼 수 있는 일종의 '시스템의 저지전략'에 불과하다는 보드리야르의 주장은 자본에 대한 저지와 억제가 곧 자신들을 옭아매는 동앗줄과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워터게이트는 스캔들이 아니다. 이건 어떤 일이 있어도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감추려고 하는 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추기는 우리가 자본의 원초적인 무대, 즉 자본의 순간적인 잔인성,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함, 근본적인 부도덕성에 접근함에 따라 우리의 도덕성이 깊어지고 도덕적 공포가 깊어지는 것을 가린다. 자본의 순간적인 잔인성,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함, 그의 근본적인 부도덕성, 이게 바로 스캔들적인 것이고, 계몽사상 이래로 공산주의에 이르기까지 좌익사상의 공리인 도덕과 경제의 등가 체계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도덕과 경제의 등가라는 계약사상을 자본에 돌린다. 그러나 자본은 이 계약사상에는 전연 관심이 없다. 자본은 괴물 같은 기업이다. 원칙도 없으며, 오직 한 가지, 그게 전부다. 자본에 규칙을 강제하면서 자본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계몽된> 사상이다. 그리고 혁명적 사상을 대변하는, 자본에 대한 모든 비난은 오늘날 자본이 놀이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다시 비난한다. <권력은 정의롭지 못하며, 그의 정의는 계급의 정의며, 자본은 우리를 착취한다 등.> 마치 자본이 그가 움직이는 사회와 계약에 의해 맺어져 있기라도 하였듯이. 자본이 이 사회계약의 환상에 따라 행동하기를, 조만간 행동할 것으로 그리고 사회 전체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기를 바라면서, 자본에 이 등가의 거울을 드리우는 것은 바로 좌익이다(그러면 동시에 혁명이란 불필요해진다. 자본이 교환의 합리적 공식에 정렬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자본 자신은 정작 그가 지배하는 사회와 결코 계약에 의해 맺어져 있지 않다. 자본은 사회 관계의 하나의 환상적인 마법이며 사회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다. 그러한 자본에 대답해야 한다. 자본은 도덕적이고 경제적인 합리성에 따라 고발해야 하는 스캔들이 아니다. 자본은 상징적 규칙에 따라 응수하여야 하는 하나의 도전이다.

장 보드리야르 / 하태환 옮김 : '시뮬라시옹(민음사)' 중에서


*풀이

자본과 인간의 일대일 대응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자본의 파생실재(hyperreal)가 되어가고 있다. '자본은 상징적 규칙에 따라 응수해야 하는 하나의 도전(p.46)'이라는 보드리야르의 언급은 이미 낡고 진부하며, 스스로 판 함정에 갇혀있는 듯하다. 하지만 자본에 대한 고발은 이미 사라져가는 체계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시도일 뿐만 아니라 시뮬라크르화된 사회에서 엿볼 수 있는 일종의 '시스템의 저지전략'에 불과하다는 보드리야르의 주장은 자본에 대한 저지와 억제가 곧 자신들을 옭아매는 동앗줄과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주: 좌익의 자본에 대한 고발은 전통적인 이원론적 대립에 근거한 것이다. 시뮬라크르화된 사회는 이러한 이원론이 무너진 사회다. 따라서 자본에 대한 고발은 이미 사라진 체계(이원론적 구조)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시도이며 동시에 짐짓 대립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시스템의 저지전략(p.28)'에 불과하다. 인간이 자본의 파생실재화 되어가는 한 자본은 저지하고 억제해야 할 도전이 아니라 반성과 성찰을 통해 하루빨리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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