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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3. 16. 16:05

인간과 삶에 대한 확신이 가득한 건강함 뒤에는 다양한 종류의 굳건한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 그 신념의 대상이 종교든, 이성이든, 과학적 합리주의든, 막시즘이든, 구조주의자들의 구조든, 니힐리스트들의 시뮬라크르든, 지푸라기라도 붙잡지 않고서는 허우적거리며 가라앉다가 마침내 익사하고 만다. 폐를 채울 물도 공기도 없는 곳에서 익사라니.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며 살아 온 타성이 물을 만들어 낸다. 머릿속에 깊이 박힌 숨쉬기 운동에 대한 강박관념이 공기를 만들어 낸다. 풍부한 감수성을 가진 이들은 번개가 내려치듯 정신을 고양시키는 찰나의 해방감을 바탕으로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켰다. 어떤 이들은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여 매개를 만들어내고 또 어떤 이들은 영혼을 부정하거나 육체를 부정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 어떤 감언이설에도 흔들리지 않는 건강함뿐.

어느 날은 아주머니의 모습이 내게 새로운 빛깔로 비치게 된 사건이 생겼다. 그곳에는 그때 폴란드인가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늙은 노인이 한 분 있었다. 그 사람은 재산을 모았다가 다시 날려 버리고 세 번이나 얻은 부인도 모두 죽자 황혼기를 양로원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카라얀이었는데 모습이 약간 무서웠다. 검은 반달형으로 생긴 수염이 부풀은 양쪽 입가에서 어깨까지 덮여 있었다. 고령인데도 아직도 머리카락은 검었으며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가운데로 가리마를 타서 넓적한 누런 얼굴에까지 흘러내렸는데 때가 끼어 반들반들했다. 어린애들은 카라얀을 무서워했다. 애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면 어른들은,

"저 봐라! 카라얀이 온다."

하고 겁을 주곤 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사람을 잡아당기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아마도 그의 노래 솜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때때로 나는 양로원에 가까운 숲 속에 앉아 카라얀이 깊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낯설고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을 엿들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을 싫어했다. 멀리서 그가 걸어오는 게 보이기만 해도 문을 닫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개를 풀어놓기도 했다. 학교에 다니는 애들은 카라얀이 고양이와 뱀도 잡아먹고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나 훔치며 자기의 부인도 세 사람을 모두 약을 먹여 죽였다는 등 하며 얘기들을 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혼자 집에 있었다. 그때 카라얀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문을 닫아 버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가 벌써 집안에 들어섰다. 몸 전체는 거칠기가 짝이 없지만 걸음걸이는 나긋나긋한 짐승 같았다. 아무 말도 없이 내 곁을 그대로 지나쳐서 아저씨의 서재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방 문을 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는 계시지 않아요. 왜 그러세요?"

그는 나를 밀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겁에 질리고 잔뜩 긴장한 나는 그 사람의 행동을 자세하게 감시했다. 몽유병 환자처럼 방을 헤매다가 그 사람은 장으로 갔다. 그 속에는 아저씨가 돈을 넣어 두는 궤짝이 놓여 있었다. 말려 봐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카라얀은 더럽고 누렇고 뜬 손으로 돈을 움켜쥐었는가 싶었는데 벌써 돈은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모든 일이 마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일어나기라도 한 듯이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몸을 돌렸다. 복도로 나오면서 그가 말했다.

"저녁에 놀러 오너라. 노래를 불러 주마."

미끼는 던져졌고 그것이 거의 받아들여질 뻔도 했다. 그러나 카라얀의 계산 착오였다. 그때 아주머니께서 오셨다. 카라얀은 소매가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굽혀 인사를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손바닥을 펴서 뭐라고 중얼거리며 구걸을 청했다. 나는 아주머니의 옆구리를 찌르면서 그 사람이 한 일을 귓속말로 알려드리려고 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내 얘기를 그냥 건성으로 들어넘기는 듯했다. 아주머니는 다정하게 카라얀의 더러운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와요. 마침 차를 한 잔 준비했어요."

카라얀은 몸을 돌려서 부엌으로 따라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기회를 엿보아 나는 아주머니에게 소곤거렸다.

"아주머니, 저 사람이 돈을 꺼냈어요. 아주 많이요."

그랬는데도 이상하게 아주머니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두세 번이나 그래봐도 여전히 헛일이었다. 아주머니는 그 더러운 카라얀에게 아주 친절하게 커피와 빵을 대접했다. 이것저것 재미난 얘기가 오고 가더니 아주머니가 물으셨다.

"돈이 필요해요? 카라얀."

그 늙은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닙니다. 지금은 필요한 건 무엇이든 있습니다."
"돈을 뭣에 써요? 카라얀."
"담배를 사야지요. 마님."
"그렇다면 좋아요. 여기에 돈이 있어요. 이거면 담배를 한 봉지 살 수가 있을 거에요."

늙은이는 아주머니가 또다시 빵을 가지러 자리를 뜬 뒤에야 비로소 그 돈을 집어 넣었다. 나중에는 식탁 위에 빵부스러기를 탁탁 두드려서 그것을 손가락으로 핥아먹었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눈을 돌리지도 않고 그 사람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카라얀은 몸을 일으켜 다시 땅에 닿도록 인사를 드렸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일을 좀 거들어 드리겠습니다. 마님."
"좋아요, 그렇다면 부엌에 있는 커다란 화분들을 수렵실로 좀 옮겨 줘요."

하면서 아주머니는 그에게 길을 가리켜 주고는 나를 데리고 화원으로 갔다. 카라얀 혼자 집안에 놔두고 말이다. 집안에는 옷장 따위가 전부 채워지지도 않았는데.

"아주머니, 카라얀을 혼자 두지 마세요. 그는 돈을 훔쳐요. 두고 보세요."

하고 내가 당황해서 말했다.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나는 아주머니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소동이 벌어지고 결국은 절도죄로 끝장이 나고야 말겠지. 얼마 뒤에 카라얀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인사를 했다.

"다했습니다, 마님."

아주머니는 그에게 고맙다면서 손을 맞잡아 주었다.

우리들은 그 사람이 화원을 지나 소리없이 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부끄러워하며 거기에 서 있었고 아주머니는 미소를 짓고 계셨다. 그 미소는 점점 얼굴 전체에 번져서 밝고 따뜻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변해 갔다.

"좋은 사람이야."

하고 아주머니가 말을 꺼냈다.

"사람을 바로 이해해야지."

나는 또다서 내가 처음에 본 일을 보고했다.

"그래?"

하고 아주머니는 한숨을 지었다.

"돈은 없는데 아무도 그에게 돈을 주려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하든 어디에서든 돈을 손에 넣어야지. 별다른 방법이 없으면 말이야."

잠시 후에 부엌으로 들어갔을 때 식탁 위에 돈이 놓여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무엇 때문에 카라얀은 돈을 두고 갔을까? 왜 그랬을까?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아무도 모르게 돈을 궤짝에 다시 넣어 둘 수도 있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눈에 띄게 여기에 두었을까?

나는 갑자기 두 사람을 이해했다. 아주머니와 카라얀을. 나는 아주머니에게로 달려가서 아주머니를 안고 흐느껴 울었다.

루이제 린저 /홍경호 역 : '잔잔한 가슴에 파문이 일 때(범우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