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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24. 16:07


파괴의 마왕으로 변한 쿠샨대제

베르세르크의 한 장면


언제부터인가 나는 가장 인상깊게 읽은 만화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얘기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가 일본의 만화잡지 월간 아니메쥬에 12년간 연재했던 종이만화(우리나라에서는 일본만화 전문번역가인 서현아씨가 옮긴 도쿠마쇼텐(德間書店) 라이센스판으로 2000년 12월 학산문화사에서 발행되었다)이며 원작을 1/4 정도로 축약시킨 내용을 재구성의 형식으로 가까스로 담아냈던 애니메이션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은 작품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의 만화잡지 영애니멀(구 애니멀하우스)에 지금도 연재되고 있는 미우라 겐타로(三浦建太郞)의 베르세르크(Berserk, 버서크, 버서커, 벌거벗은 채 미친듯이 전투에 임했던 중세스칸디나비아의 전사들을 일컫는 말로 우리 말로 옮기면 狂전사)이다. 만화를 잘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이 작품은 1989년부터 지금까지 햇수로만 무려 20년째 연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자로 하여금 팽팽한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게끔 만드는 엄청난 완력을 과시하고 있다. 처음에는 설정된 캐릭터를 가진 주인공이 에피소드를 하나씩 해결해가는 설정 중심의 만화로 출발했으나 차츰 그 설정의 전모를 밝혀나가면서 현재는 방대한 스케일의 서사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사실적이며 역동적인 미우라 겐타로 특유의 그림체는 탄탄해지고 캐릭터들의 설정은 매우 견고해졌는데 마니아층의 높은 충성도를 자랑하면서 동시에 대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는 캐릭터나 그림체 그리고 줄거리 중심으로 만화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독자의 관점에서 탈피해 이 작품에 깔려있는 철학적 배경과 작가의 세계관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들은 시지프스에게 끊임없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그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시지프스는 아무런 의미도 희망도 없는 노동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확실히 성취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바위를 밀어 올리는 그의 고통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의식에 눈이 떠져 있고 자신의 비참한 존재상황을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다. 그는 부조리를 발견한 인간이다. 그래서 그는 승리자이다. 그의 운명은 그의 손에 속해 있으며, 그의 바위는 그의 소유물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야말로 하루하루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스의 신화' 중에서

미우라 겐타로는 베르세르크의 두 주인공 가츠(Guts)와 그리피스(Griffith)의 대비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답다'라고 일컫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 쉬지않고 질문들을 던진다.

초기에 사도들(apostles)의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의문이 다양한 변주를 그리며 제기되던 베르세르크는 끊임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며 주어진 운명(인과율)에 반항하는 실존적 인간, 바로 시지프스의 현신이라고 할 수 있던 두 주인공의 운명과 현실이 부조리하게 맞닥뜨린 순간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철학이 펼쳐진다.

운명의 갈림길에 선 두 주인공 중 가츠는 여주인공 캐스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이 천착하는 구체적인 현실의 삶, 즉 실존적 삶의 뿌리를 지탱해 나가는 반면 그리피스는 악마에게 혼을 팖아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과정에서 실존적 삶을 외면하고 스스로의 인간성까지 부정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자들의 생에 대한 마지막 집착과도 다를 바 없이 비뚤어진 그리피스의 최후의 욕망은 수많은 타인들의 희생을 발판삼아 길고도 지루한 악몽을 시작하게 만들지만 그 악몽은 결국 가츠가 남긴 인간적 온기의 상흔을 계기로 깨어질 수 밖에 없는 불완전한 것임을 작품은 예정하고 있다(미우라 겐타로에게 있어 가츠는 진짜 인간임에 반해 그리피스는 가짜 인간과도 다름없기 때문에 이는 당연히 예정된 결말이다).

또 베르세르크가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 미우라 겐타로는 이렇게 고발하는 듯하다. '기독교는 미신을 몰아낸다는 핑계로 자기 자신도 또다른 미신이라는 사실을 도외시한 채 인류의 삶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해 주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 줄 자산들인 다양한 신화와 설화, 꿈과 환상을 말살시키는데 너무 많은 힘을 낭비시켰다. 그들은 독점의 욕망을 버리지 않고 필요할 때만 과학을 대척점에 위치시켜 자신들의 원죄를 은폐하려 들지만 정작 과학은 기독교가 폐기하려고 했던 것들을 포함해 기독교까지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자 장치일 뿐이다.'라고 말이다.

판타지 서사구조 얼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마니교적(선악이원론적) 대립을 근간으로 하는 듯 하면서도 눈먼 양떼를 몰고 다니는 광명의 예언자 자리를 오히려 암흑의 마왕 몫으로 그려내 주인공의 위치를 뒤바꿈으로써 경계를 넘나드는 현실의 선악 탓에 혼란을 느끼며 분열하는 자아를 서슴없이 드러내곤 하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선악이란 결국 방편적 개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브락사스적 세계관을 통해 비판적으로 강조하는 미우라 겐타로는 자신이 스스로 제기한 위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실존적 인간이 그 해답이다'라고.

니체와 헤세, 까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 단 자극적인 장면이 많기에 15세 미만에게는 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