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 1. 00:24
[文化]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버트란드 러셀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만 실존주의 철학자들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가 동물 행동학과 진화 생물학을 전공한 영국인 과학자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들을 다루기 힘든 것이 당연하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무신론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선 그에게서 '신은 죽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던지며 일생을 기독교와 싸웠던 니체나 '인간은 無 한가운데 던져진 존재(Geworfenheit)'라고 했던 하이데거, 또는 '존재는 필연이 아닌 우연이다'던 사르트르와 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그림자를 찾아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다만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자로서 다윈주의를 근거로 한 '신은 없다, 창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주장을 가지고 대중을 설득하려고 하는 반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들은 당시에 이미 무신론을 기정사실로 받아 들이고 오히려 그로 인해 인간에게 초래되는 불안과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앞의 글에서 제기했던 '믿음 또는 신앙이 없거나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한 부정을 감내할 만큼의 충분한 지적인 용기가 없으면 불안, 절망, 우울, 고통 등이 야기된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들을 인용해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19세기 도스트예프스키가 '악령'에서 무신론으로 인한 불안과 허무를 벗어날 방법은 자살 밖에 없다는 듯 끼릴로프와 스따브로긴을 자살로 내몰았을 때나 니체가 '신은 죽었다. 고로 우리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신은 모든 존재와 모든 가치의 근원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러한 불안과 허무는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지금은 19세기 만큼 종교가 인생에서 일정한 의미를 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또 당시의 사고방식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기에는 생물학, 의학, 심리학, 인류학, 종교학, 고고학, 사회학 등 여러 분야의 수많은 성과들이 신에 대한 의문을 당연시 여기게 만들었다. 따라서 무신론에 의한 불안이나 허무는 시위를 당긴 만큼 화살이 나가는 것처럼 유신론에 경도되었던 만큼 그 반작용으로 인한 충격과 고통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렇다면 루이스 월퍼트의 주장처럼 믿음 또는 신앙이란 생존 경쟁에 유리하기 위한 진화의 산물로서 뇌 속에서 이루어지는 명령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25세기가 되어도 교회와 절은 동네마다 안존할 것'인가? 개화된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무속행위가 존재하듯이 역사보다도 인간의 내면에 더 뿌리를 깊게 내린 종교도 어떤 형태로든 생존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형태와 규모로 안존할 것이라는 말은 넌센스다. 즉 왕실에서 국가 중대사를 놓고 굿을 벌였던 15세기의 무당과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기꾼과 동급으로 취급받는 21세기의 무당이 큰 차이가 있듯이 무신론적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과거의 단점과 해악을 줄이는 쪽으로 변화하지 않는 종교의 영향력은 급속히 감퇴하여 종교는 일순간에 지식하위계층의 미개한 습속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또한 현재 과학의 발전 속도나 수요를 생각했을 때 월퍼트가 주장하는 종교의 순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발명품이 나오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다만 이런 예상은 종교를 이용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의 반발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고 그 반발의 여부와 정도에 따라서 종교 몰락의 일정은 늦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지역, 문화 등 개별적 특수성도 고려하지 않았다). 또 이는 월퍼트와 같은 다윈주의자들에게는 '인생의 의미가 정해지지 않았듯이 진화의 방향이나 속도 또한 정해지지 않았다.'는 명제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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