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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 29. 11:15
눈이 억수로 쏟아지던 날, 뉴스에서는 고향을 눈앞에 두고도 눈쌓인 고속도로에 갇힌 채 오도가도 못하는 차량들만 비춰주던 그날, 미리 서울행 열차를 예매했다. 다들 나랑 비슷한 마음인지 밤 늦게서야 도착하는 일부 무궁화호를 제외하고는 전 열차의 좌석이 매진이었다. 새마을호가 하루에 고작 두 편 다니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는 통일호가 아닌 무궁화호 표를 끊으면서 아직은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던 꽤나 그럴 듯한 열차였는데 지금은 왜 이리 천덕꾸러기가 됐을까. KTX보다 겨우 한 시간 삼십 오 분 더 걸릴 뿐이잖아? 하지만 막상 무궁화호에 몸을 싣자 완행열차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온갖 역에 쉬지 않고 다 들르기도 하지만 뒤따라오는 KTX에게 길을 내주기 위해 3~4분씩 정차하기 일쑤다. 게다가 넋빠진 모습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TV조차 없다니!

하행선 버스에서 두어 편의 에피소드를 읽고 나머지는 연휴 기간 내내 북적거리던 화장실에서 콧김을 뿜으며 시선을 고정시킨 채 모두 해치웠던 김언수의 '캐비닛'을 어쩔 수 없이 꺼냈다. '쳇, 이 사람들은 보르헤스를 발가락으로 읽었나? 인상적인 몇 구절들을 위해 이 자는 자신의 창작노트를 얼마나 헐어먹었을까? 귀싸대기 얼른 대세요, 불꽃슛 날려드릴테니까. 자장면이라굽쇼? 단무지가 아깝네요.' 등등 독기서린 야유와 조롱을 혼자서 겁쟁이처럼 입속으로만 우물거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느새 킥킥대고 있다. '제길, 역시 내 코드는 쥐뿔도 없는 시니시즘인가? 비참하군.'

TV가 없으니 보는 둥 마는 둥 펴들고 있던 책 너머로 들려오는 군상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고향 친구의 봉급을 티나지 않게 물어 보려고 애쓰는 경리직원 L씨, 토끼같은 우리 딸내미들만 아니라면 진즉 사표를 냈을 거라고 속으로 되뇌면서도 꼴통 김부장님께 안부인사 겸 내일 챙겨야할 것들을 전화로 확인하던 영업부 대리 K씨, 연애 결혼으로 처갓집 덕 하나 못 본 탓에 뒤돌아서면 으르렁대는 고부간 사이에서 지쳐 이번엔 아예 아이들이 아프다는 핑계로 홀홀단신 고향집을 왔다간 모 지법 판사 P씨, 메뚜기질이라면 이력이 난다는 듯 이 자리 저 자리 바쁘게 쫓겨다니며 새우잠을 청하는 입석파 대학생 C씨, 올해도 무사히 넘어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지 않을까 늘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나가요걸 3년차 K양, 용역업체에 매달 20만원씩 갖다 바치며 일 년 동안 꼬박 모은 돈을 신용불량자 아들의 뻔한 거짓말에 속은 척 건네주고 용산의 단칸방으로 돌아가는 청소 아주머니 K씨, 그래 애초부터 불쌍한 손주들 분유값 생각하며 모은 돈이니까. 속사정이야 어쨌든 바리바리 손에 들린 부침, 떡, 멸치, 버섯, 참기름, 김치, 조기, 고춧가루, 김, 간고등어 꾸러미에 우리네 명절의 정취를 싣고 덜컹거리는 밤기차는 하염없이 어둠속을 달려 서울로, 서울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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