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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27. 14:41

지난 대선에서 2MB이 당선되었을 때 경제에 대한 전국민적 열망이 다른 모든 것들을 압도한 결과라고 규정 지은 적이 있다. 또 2MB의 승리는 이념 갈등이나 과거사 청산과 같은 당위적 주장들에 염증을 내던 국민들의 마음을 잘 파고든 실용주의 노선의 승리라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도 이런 얘기들이 나올라치면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는 형편이지만 2MB식 실용주의를 소박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포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2MB 실용주의의 이면에는 저급하게 이데올로기화된 힘의 논리가 깔려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용주의'로 포장된 저급한 '힘의 논리'란 다름이 아니라 힘 자체를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이데아적) 징표로 여기는 경향을 일컫는다. 즉 힘을 지고지선한 대상으로 바라보고 숭앙하며 힘 자체에서 모든 가치가 도출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도 서슴지 않는 세태가 배어있다는 뜻이다.

'자본=힘'의 등식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의미를 띄게 된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의 시민들에게는 천형과도 같은 멍에일지도 모르겠지만 대선이 끝난 후 조그맣게 메아리치다가 사라진 배금주의(mammonism)와 물신주의(fetishism)에 대한 냉소도 '목적=힘=자본=경제'의 거친 등식을 위해서라면 수단이나 절차는 무시해도 좋다는 '힘의 논리'를 우려한 자성의 목소리였을 게다.

주의할 점은 이 '힘의 논리'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펼쳐지는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힘의 논리'가 '힘'을 얻는 것은 대중들에게 투영된 현실(비록 동원된 각종 상징들과 선전 선동에 의해 조작된 현실이라는 측면도 존재하지만)의 응당한 산물이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바람직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예컨대 수단과 절차를 무시함으로써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소기의 성과를 일궈내는 한편 유신을 추진했던 박정희식 개발 독재나 흑묘백묘론을 통해 중국을 개방과 개혁으로 이끌어내는 한편 천안문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했던 덩샤오핑식 사회주의 독재가 바로 그런 예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례들을 열거하며 우리가 본받고 뒤따라야할 비전으로 제시한다면 이것은 과거로 퇴행하자는 얘기와 다름이 없다. '수단과 절차를 무시한', '독재'라는 용어의 사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러한 '힘의 논리'는 민주주의 원칙과 배치될 때가 많다. '힘의 논리'를 이데올로기화시키면('자본의 논리'에 지나치게 경도되면) '잘 먹고 잘 살자는 데 왜 그리 융통성이 없느냐 또는 왜 그리 공허한 당위를 들먹이며 딴죽을 거느냐'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지배적으로 자리잡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럴 때 우리는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지킬 것은 지켜 가면서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말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꿈꾸던 선진국이며 얼키고 설킨 분열과 갈등의 양상을 통합하고 조정해나가면서 동시에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도모하는 진정한 21세기형 실용주의 리더쉽이다.

자 이제 다시 영어 몰입교육에 관한 논의로 돌아와 보자. 앞서 이 '힘의 논리'가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시킬 때는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의 얘기를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원칙 뿐만 아니라 '힘의 논리'가 배제되어야 할 곳은 또 있다. 바로 교육의 장이다. 공리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며 교육을 통해 비반항적이며 효율적인 톱니바퀴형 인간을 양산하는 것을 꿈꾸던 사상가나 자본가들이 대종을 이루던 시절이나 사회가 존재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성장과 함께 이런 식의 공리주의는 흥정이나 계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측량할 수 있는 효용이나 이득이라는 관점으로 치환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의의 원리가 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이 널리 퍼지고 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면서 어설프게나마 시도됐던 그런 소수의 반란은 전인교육이라는 그리스적 이상의 벽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힘의 논리를 통한 호소나 드라이브(추진력)는 분명히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카드이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고 원칙을 따져 적용되어야 한다. 그게 바로 진정한 융통성이며 실용주의다. 힘의 논리에, 자본의 논리에 함몰되어 다른 가치들에 대한 시선을 거두게 되면 교조주의나 별반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2MB의 영어 몰입교육 정책은 영어교육에 대한 천박한 인식과 함께 힘의 논리의 무분별하고도 몰지각한 확장을 보여준다. 마치 영어교육의 목표가, 아니 교육의 목표가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것에만 있다는 듯 올인해야(모든 걸 다 걸어야) 한다는 맥락밖에는 엿보이질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영어교육에 문제가 없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의 원인에 대한 처방이 판이하게 다를 뿐이다. 필자는 영어교육, 영어에 대해 방법론적인 차원에서의 검토가 아닌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인식의 일대 전환, 즉 영어에 대한(서구에 대한, 미국 국적의 중산층 백인에 대한) 기존의(일본식의) 미신과 환상을 깨뜨리며 병든 노예근성을 탈피해 건강한 자유정신으로 성장하는 혁명적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