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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0. 6. 07:00
가만 생각해 보면 영어의 발음법은 참 불합리하다. 예를 들어 horse, on, one, so, to, actor 등의 단어들은 모두 동일한 'o'라는 모음을 이용해 표기되지만 그 발음은 각각 //, //, //, //, //, //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말에서 'ㅗ'라고 쓰고 //가 아닌 //나 //로 읽는 사례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영어가 얼마나 불규칙적이고 비경제적인 발음법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문자체계임을 자타로부터 공인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말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치자. 그렇지만 독일어나 스페인어처럼 알파벳이라는 동일한 문자체계를 사용하는 다른 언어들과 비교해도 영어의 발음법은 불합리함을 뛰어넘어 매우 난잡하고 너저분해 보인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어제 블로거뉴스를 읽다가 어느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은 댓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블로그의 주인장이 굳이 '블러그'라는 표기를 고집하는 이유를 적어 놓은 댓글이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댓글이지만 며칠 남지 않은 한글날이 영 마음에 걸려서 몇 자 반박해 본다.

첫째 블로그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사용하는 영어, 즉 외국어가 아니라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한국어다. 다만 한국어 중에서도 영어 단어를 차용한 외래어로서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으면 된다. 현재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국립국어원에 등재된 단어는 '블러그'가 아니라 '블로그'다. 따라서 '블로그'로 적어야 옳다.

둘째 외래어를 적을 때는 원어민의 발음을 따라가는 게 원칙이지만 위 댓글의 주장대로 '블러그'가 원어민의 발음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없다. 굳이 적어 보자면 '블라-ㄱ'나 '블로-ㄱ' 정도가 더 가까울 것이다. 게다가 외래어 표기법은 외국어 발음을 그대로 적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어 사용자들끼리 외래어를 사용해 편리하게 의사소통하는 데 도움을 얻자고 만든 일종의 약속이다. 저 댓글의 주장대로라면 바나나를 '버내너'로, 오렌지를 '어륀지'로, 라디오를 '뤠이디오우'로 표기해야 되겠지만 외국인들이 다른 나라 말을 자기 식대로 발음하듯이(가령 서울을 '쎄울'이나 '써울'이 아닌 '서울'로 제대로 발음하는 외국인이 몇 명이나 있나?) 우리도 어떤 말이든 우리가 쓰고 발음하는 대로 적으면 된다.

셋째 한국인들이 영어를 잘 못하는 것은 저 주장과 정반대의 이유 탓이 크다. 즉 발음이 맞네, 틀리네, 원어민 발음에 가깝네, 머네, 문법이 맞네, 틀리네, 미국식 영어와 가깝네, 머네 하며 따지는 습성 탓에 영어가 잘 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너희는 미국인이니 미국식 영어를 해라, 나는 한국 사람이니 한국식 영어를 하겠다' 라는 자신감이 없다는 얘기다.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만 이렇게 자신감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그럴 땐 반기문 총장의 영어 구사나 조셉 콘라드의 영문 소설[각주:1]을 떠올려 보라. 전혀 주눅들 필요가 없다.

나는 우리말처럼 뛰어난 언어가 없고 한글처럼 훌륭한 문자체계가 이 세상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영어는 우리말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과거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라틴어가 화석화되었듯이 영어도 지금처럼 언어로서의 비경제성과 불합리성을 씻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언어 사용자들로부터 외면 받을 수 밖에 없다. 아무리 포용과 융합에 능하고 새로운 명사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문화적 뒷받침을 받는다 하더라도 세계 제패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자연스럽게 제국과 운명을 함께 할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북미 대륙에서 영어와 더불어 스페인어와 중국어가 공용어로 채택될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오는 한글날에는 주변의 영어 광풍에 부화뇌동하던 일을 잠시 잊고 내 모국어로 된 시집을 한 권 사서 읽어 보는 것이 어떤가? 자랑스러운 우리말과 우리글이 세계로 뻗어나가 영어 따위는 배울 필요도 없이 전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흐뭇한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보는 것도 괜찮고...
  1. 러시아 국적의 폴란드인으로 청년기에 영국으로 귀화했던 조셉 콘라드도 주류 영어 문학작품에 비해 상당히 이국적인 영어를 사용해 글을 썼지만 'Lord Jim', 'Heart of Darkness' 등 유명한 영문 소설들을 남겼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