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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2. 2. 21:32

아까 <다음 아고라>에서 영어 정책에 관해 벌어지는 다양한 공방을 구경하다가 흥미를 자극하는 댓글을 발견해서 몇 자 적어 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엉성하게 빨간 줄 긋는 정도가 제 포샵질의 한계입니다


위에 소개된 댓글의 내용은 다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 보신 얘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저도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께 들어 본 것도 같고 영어 선생님께 들어 본 것도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그 옳고 그름에 대한 의문도 좀처럼 품지 않을 거라는 제 짐작이 맞는다면 일종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과연 이 상식은 맞을까요?

우선 '노랗다'라는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우리말 형용사들을 사전을 통해 찾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랗다, 뇌랗다, 샛노랗다, 싯누렇다, 감노랗다, 연노랗다, 누르다, 누르스름하다, 누릇하다, 누름하다, 노르께하다, 노르칙칙하다, 노리끼리하다, 노르끄무레하다, 노르끼레하다.

겨우 5분 정도의 시간을 인터넷 국어사전에 투자해서 찾을 수 있는 표현만도 15 가지나 되는군요(각 단어의 정확한 뜻과 뉘앙스(어감)의 차이가 궁금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영어사전 펴 보는 수고의 1/10 정도만이라도 한 번쯤은 국어사전에 투자해 보시라는 의미에서 직접 찾아보실 것을 권장합니다).

그렇다면 영어로 '노랗다'는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은 몇 개나 있을까요?

yellow(노란), yellowish(누르스름한), xanthous(노르스름한, 황인종의), amber(황갈색의, 호박색의), bisque(분홍빛이 도는 황갈색의), blond(금발색의), buff(담황색의), chrome(크롬 황색의), cream(유황색의, 우유빛 황색의), gold(금색의), ivory(상아빛 황색의), lemon(레몬빛 담황색의), maize(옥수숫빛의, 담황색의), orange(어륀지색의, 참고로 2MB정부의 시책에 적극 호응하는 마음에서 이 단어만큼은 이제 어륀지라고 쓰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saffron(사프란색의, 선황색의), sand(모래빛 황색의), tawny(황갈색의)

놀랍게도 '노랗다'는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영어 형용사는 오히려 우리말보다 두 개 더 많은 17 가지나 됩니다. 물론 우리말 표현과 마찬가지로 5분 정도의 검색을 통해 작성한 목록이기 때문에 우리말이든 영어든 제가 빠뜨린 단어들도 상당할 겁니다. 그렇지만 흔히들 믿는 것처럼 '우리말은 다양하고 섬세한 표현이 많지만 영어는 그렇지 않다'라는 상식(?)이 여지없이 무너지기에는 충분해 보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표현들을 실제 대화나 글에서 사용한다고 할 때 우리말과 영어 중 어느 쪽이 노란색의 '정도'나 '차이'를 더 뚜렷이 느끼게 하면서 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한국인으로서 기분이 상할 수도 있지만 공정한 심판이라면 역시 영어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감이 오십니까?

보르헤스의 유명한 단편소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나옵니다.
 
"<우르스프라헤(원초적 언어라는 뜻의 독일어)>에는 명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명사는 형용사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달>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둡고 둥그런 위에 있는 허공의 밝은>, 또는 <하늘의-어륀지빛의-부드러운>, 또는 다른 집합의 방식으로 달을 말한다"


보르헤스는 인간의 모든 문화적 행위를 언어의 파생물이라 전제하고 특히 인류 문명사는 곧 명사 축적의 역사라는 시각을 견지합니다. 난학(蘭學, 네덜란드학)과 영학(英學, 영국학)을 공부했던 19세기 일본의 많은 계몽사상가들이 자신들의 문화권 내에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서양의 생소한 명사들과 그 개념을 수용하는데 있어 주저함이 없었기에(예컨대 모리 아리노리는 society를 사회라는 신조어로 니시 아마네는 science를 과학이라는 신조어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걸 지금의 우리도 쓰고 있는 셈이죠) 본격적으로 명사 축적국의 대열에 합류하는데 성공하여 지금은 오히려 과거 자신들의 교사였던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을 압도하는 수준(예를 들자면 현재 우리가 흔히 쓰는 '환경호르몬'이라는 말도 일본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단어라고 합니다)에 이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명사'가 현대 문명의 척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자 이쯤되면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영어가 우리말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이냐?' 하고 속으로 되뇌고 있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물론 이런 질문을 실제로 던졌던 분들이 계시다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라고 권해 드리고 싶지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현대 문명의 발전 경향을 고스란히 반영할 수 있는 우리말 명사의 숫자가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최고 수준의 명사를 꾸준히 만들어 내는 문화권으로부터 명사들을 끊임없이 수입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게 무엇일까요?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를 이미 많은 분들이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시고 저 또한 이미 했던 얘기이지만 되풀이를 한 번만 더 하겠습니다. 교육이 그야말로 백년지대계라는 본뜻에 걸맞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명사들을 만들어내는 힘'을 가진 인재들을 기르는데 온 힘을 다 쏟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명의 한 축인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와 함께 창의력, 창발력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전제된 상태에서 고도의 추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논리적 사고력에 대한 훈련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걸 학교의 과목으로 풀어내면 예술, 인문, 국어, 수학, 과학에 대해 집중적인 관심과 장려가 쏟아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발, 영어가 아니라구요!!!(그렇다고 해서 명사들을 제대로 수입하는 일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족. 사실 제가 꼬집고 싶었던 부분은 대체 왜 이런 잘못된 상식이 끊임없이 공공연하게 재생산되는가 하는 문제였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또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네요. 그래도 생각에 칼을 못 대서 난삽하고 집중하지 못하는 문체를 벗어나려고 무진장 애쓰는 중입니다. ^^; 원래 쓰려했던 내용을 잠깐만 소개하자면 그런 문제의 원인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허세'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에 있다고 보고 그놈의 허세가 대체 무엇인가 한 번 써 보고 싶었죠.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자국에 조선을 알리면서 이구동성으로 했던 얘기가 바로 '조선인들은 허세부리기를 좋아하고 허례허식을 중시한다'였거든요. 생산적인 반성과 파괴적인 자학을 구분 못하는 오류에 대해서도 말할 거리가 있을 듯하고요. 그리고 문자 체계로서의 한글과 언어 체계로서의 한국어를 구분 못하는 분들이 가끔 보이시던데 왜 그런 분들이 자꾸 생기는지 단순히 교육의 문제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가 누가 좀 써줬으면 좋겠어요.

덧붙임. 본문에서 우리말의 예는 '노랗다'라는 한 단어의 활용인 반면 영어의 예는 yellowish를 제외하고는 각자 다른 단어들인 명사형 표현들을 열거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글쓴이인 제가 첨가어인 우리말의 특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활용'의 의미를 너무 좁게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잘못입니다. 언어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여 의사를 소통하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문화와 역사가 담겨져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했듯이 아예 문화는 언어의 파생물이라는 주장도 있지요. 언어의 우열을 비교하기 힘든 것은 바로 그런 탓입니다. 제가 본래 말하려고 했던 취지는 우리말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말이 더 뛰어나다고 허세부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문자체계로서의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찬사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댓글로써 이 글의 잘못을 지적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