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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20. 04:08
Wife: Honey, Can u help me with the garden?
Husband: Do I look like a gardener?

Wife: Honey, The toilet is broken!
Husband: Do I look like a plumber?

(He went out for lunch...when he came back home, everything was fixed)

Husband: Did u fix them all?
Wife: No, neighbor‘s son did and he said I had to make a burger for him or sleep with him.

Husband: So, did u make a burger for him?
Wife: Do I look like a Burger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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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 17. 02:00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이슬람도 이웃을 사랑하고 평화를 존중하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테러리스트라고 하면 이슬람 터번을 쓰고 얼굴을 가린 채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먼저 떠올린다. 미드나 헐리웃 영화에 자주 노출되면서 무의식적으로 미국식 가치관이 주입된 탓이긴 하지만 중동과 인도네시아나 파키스탄 같은 이슬람 국가에 소재한 단체의 테러가 빈번한 것이 사실이긴 하다.

사실 이슬람의 테러리즘은 자체적으로 시작됐다기 보다는 유명한 이스라엘의 첩보기관 모사드가 창설된 후 중동전을 치뤘거나 이스라엘과 대립하던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광범위한 도청, 요인암살, 군사기밀수집, 폭탄테러 등 다양한 정보활동이 펼쳐지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활성화됐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란-이라크 전쟁과 같은 냉전의 틈바구니에 미국과 소련의 군사적 지원이 보태지면서 테러리즘은 더욱 강화되었다. 즉 지금과 같은 조직적, 계획적 테러리즘의 시초는 이스라엘의 모사드고 이를 지금처럼 키워낸 것은 미국과 소련이라고 해도 썩 틀린 말은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이런 사실은 최근까지도 전세계의 언론을 장악하고 있던 WASP과 유대계 자본 탓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게다가 유태인은 'spin doctor'라는 단어의 창시자라고 불러도 될 만큼 매우 전략적인 언론플레이를 하며 전세계에서 심리전의 최고봉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기존 언론의 비중이 축소되고 있고 전세계적으로 매스미디어의 개념 자체가 바뀌고 있는 중이라 우리나라 같은 미국의 동맹국가에서도 이스라엘에 의한 테러 보도를 쉽게 접할 수 있는데 가령 최근 모사드에 의한 이란 핵물리학자 암살 사건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휘소 박사가 표적테러로 사망한 것과 다름없는 그런 사건인데 지금까지 모사드에 의해 암살된 이슬람 과학자만 해도 수십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해당 국가에서 그런 과학자는 천재 중의 최고 천재로서 인적 자원의 엄청난 잠재력 손실을 입게 된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외교적 원칙은 확고하다. 공격에는 몇 배의 철저한 응징으로 되갚는다는 것이다. 전략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선택이다. 이번 일처럼 자신들이 먼저 저지른 일에는 더 약한 수위의 보복만을 감수하고 그 이상의 보복이 돌아올 때는 다시 재보복을 한다. 그런 점에서 엊그제 태국에서 발생한 이란 공작원들의 이스라엘 외교관 테러 실패는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었지만 서글퍼 보이기까지 한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초정밀위성 및 스파이에 의해 주요 인물과 기관이 자세히 감시되는 상황에서 보복할 능력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지나친 보복을 했다가 당할 지도 모를 이스라엘의 재보복이 두렵기도 한 것이다. 이란의 대통령 등 집권세력이 국민들에게 큰소리치는 것과는 별개로 국가의 안보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 국정책임자로서 책임있는 행동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고민이리라. 더구나 현재 이란은 핵개발에 국가의 모든 역량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최선의 전략을 선택해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계는 유태인들의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덜 통하는 나라들이 많아졌다. 미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줄었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생존력 강한 유태인들에게 아시아인으로서 해줄 조언은 딱 한 가지다. 자기네 조상들처럼 오만함에 빠져들지 말고 하루 빨리 이슬람권과 평화공존할 수 있는 해법과 타협점을 찾아내라는 것이다. 정보 혁명은 정보를 독점하던 세력의 비교 우위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것이다. 결국 유태인들도 머지 않아 무슬림들에 의해 따라잡힐 것이고 그때까지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것은 곧 이스라엘에게는 파멸을, 세계에는 대혼란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2012. 2. 16. 22:40
먼저 나는 나꼼수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진중권이 나꼼수에 대해 구체적으로 뭐라고 한 지에 대해서도 들어본 바가 전혀 없고 오로지 한겨레21 기사(커버스토리 '陳의전쟁'편,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19130.html)만을 토대로 이 글을 쓴다.

기사를 보면 진중권은 자신이 일관된 사람이라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의 일이관지는 '합리성'이라는 근대적 가치에 함몰되어 오로지 '이성'에 입각한 비판만이 지식인의 사명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세상, 대중 혹은 권력의 작동원리가 합리성을 지향하고 또 가정하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비합리적으로 움직인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기에 만사에 냉소적이다. 간단히 바꿔 말하자면 그는 비합리적인 상황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기사에 드러난 나꼼수에 대한 그의 시각을 보자.

진중권도 <나꼼수>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나꼼수>가 주류 언론과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이 누적된 상황에서, 좌절·분노·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일정한 카타르시스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 구술 메시지의 파급력도 높이 산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그 안에서 유통되는 과도한 음모론과, 대중의 열광에 편승해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나꼼수> 제작진들의 ‘정치적 욕망’이다. 진중권은, 자신의 비판이 <나꼼수>에 ‘놀이’ 또는 ‘오락 프로그램’으로서의 ‘제 몫’을 찾아주기 위한 차원이라고 거듭 강조해왔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나꼼수의 긍정적인 면은 인정하되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의 행간에는 나꼼수가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팟캐스트라는 물리적인 방식이 아니라 과장된 음모론)에 대해 나꼼수의 대척점에 서 있는 대상들의 그것(조선일보 따위의 찌라시들)과 어떤 의미에서 유사하다고 보고 있는 그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팟캐스트를 통해 대량으로 유통되는 나꼼수의 음모론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거기에 지나치게 열광하는 것은 '이성'의 눈으로 보자면 일종의 독이나 마약과도 같은 것이기에 당장의 대증적 효과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떤 부작용(?)으로 인해 부메랑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따라서 누군가는 그런 예상되는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비판의 총대를 메고 나서 나꼼수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제한적으로 받아들이자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고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라는 내용이다.

먼저 진중권이라는 인물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너무 순진하다. 어리숙하다는 뜻이 아니고 비합리성을 세상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숙함(합리성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가 부족한 탓이 있다)을 일컬어 순진하다는 말이다. 세상에 눈을 뜬 이래 마지못해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불편해 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진중권이 속한 세대는 가장 극렬한 운동권들조차도 민주주의가 내면화되지 못한 채 민주주의를 어떤 수단으로만 여기면서 과장된 이념으로 포장하는데 그쳤던 사이비 민주주의자들(당시에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이 곳곳에 끼어서 판치던 세대지만 그나마 진중권은 저런 순진함 덕에 그런 사이비들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진중권의 순진한 유리알유희야 말로 앞으로 벌어질 도도한 권력의 이동을 방해하는 어깃장에 불과하다. '도리어 해가 되거나 자충수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오히려 나꼼수보다 더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대중을 이용하는 술수를 부리고 효율적이기만 하다면 나꼼수의 과장된 음모론보다 훨씬 더 심한 왜곡과 기만을 펼쳐야 한다. 거대한 지배세력의 카르텔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진실이라면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수백, 수천명이라도 자발적으로 가담하여 은폐하게 만들고 어딘가에서 찍어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창끝에 맹독을 거침없이 발라 찔러 죽이거나 폐인을 만들어 버린다. 이게 바로 생존의 현실이며 전략적으로 가장 탁월한 선택이다. 지배세력이 계속 지배권을 유지하는 이유는 생존에 가장 유리한 전략적 선택을 하는데 아주 능하기 때문이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서는 괴물이 되어야 한다. 괴물이 되지 말자고 하는 진중권식의 비판은 정당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더 나은 괴물이 되길 바라는 게 최선이다. 유사 이래 세상에는 수많은 괴물들이 등장했고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괴물이 등장할 때마다 인류는 조금씩 더 앞으로 나아갔고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바로 그런 희망과 믿음이다. 당장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과욕이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숱하게 희생하면서 벽돌 한 장씩을 쌓아 올려 지금을 일궈낸 조상들 앞에 겸손할 필요가 있다. 우리도 우리 세대 동안 단지 벽돌 한 장만이라도 쌓아 올리면 충분하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이성'의 반대는 '반이성'이 아니라 '생존'이다. '이성'과 '생존'의 대립은 '문명'과 '야만'의 대립이다. 진중권이 휘두르는 이성의 칼끝은 다음 세대를 향해야 한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는 것은 언젠가는 괴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어쩔 수 없이 택하는 전략적 선택의 문제일 뿐이고 우선은 괴물과 싸워야 한다는 당위 자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에서는 '생존'보다는 '이성'이 우선해야 한다. '경쟁력 강화'를 내세우며 이성을 마비시켜 모든 문제를 생존의 문제로 치환하려는 지배세력의 '교육기관 노예양성소화 전략'이 교육계로 침투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으로 15년 정도 후면 민주주의가 내면화된 세대가 주된 기성 세대가 되고 현재의 지배세력도 '조금 더 나은' 지배세력으로 대체될 것이다. 신지호 같은 정신병자들이 자칭 386이랍시고 설치면서 찧고 까불 향후 10년 동안은 가망 없다.